안희정 미투 고발, 김지은씨의 고통스러운 기억
평소 들락날락 거리는 알라딘 도서 앱에 어느 날 자몽빛 배경의 신간 소개가 눈에 들어왔다. ‘김지은입니다. (부제: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 이었다. 평소 책을 고를 때 처럼 목차를 대충 훑어본 뒤 바로 구매했다. ‘대법원 판결이 났었구나..’ 빠르게 기사를 검색해보고 안희정이 유죄로 형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한 나의 지식은 그리 깊지 않았다.
서지현 검사를 필두로 미투가 봇물처럼 터져나올 때도 판에 박힌 주변인들의 2차 가해의 말들로 기사 제목들이 수 놓아졌고 나는 그것들을 온전한 정신으로 쳐다볼 수 있을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김지은씨의 방송과 그 이후의 안희정 기습검찰 출두 소동 등은 알고 있었지만 그 이후 오래 지속된 재판 소식을 계속 주시하고 있자니 정신적 소모가 컸다. 그래서 이후에 파생되는 뜬소문들-2차 가해에 해당하는-에 의도적으로 귀를 닫고 관련 기사를 읽지 않았다. 사실은 김지은씨가 방송에 나와 안희정의 성폭력 사실을 폭로했을 때 내가 다니던 회사에서도 성추행 문제가 발생했고 그를 둘러싼 처분을 진행하는 중에 있었다. 나의 몸과 마음 역시 상당히 닳고 있었다. 가해자 안희정이 하는 이야기나, 내 직장에서 가해자가 하는 이야기가 내용만 달랐지 형식적인 면에서는 똑같은 항변이었기에 더욱 괴로웠다.
아직도 회사에서의 기억은 너무나 괴롭다. 자세한 사정은 여기에 설명할 수 없지만 여전히 그 앙금이 많이 남아있다. 피해자가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되는 ‘피해의식’을 비정상적인 반응으로 여기고 지지는커녕 피해자를 고립시키려 했던 다른 동료들을 생각하면 아직까지도 너무 밉고 화가난다. 그렇기에 더욱 김지은씨가 지금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피해자 입장에서 기술한 사건의 경과는 어떠했는지 알고 싶었다.
세간에 많이 알려져있다시피 김지은씨는 안희정의 수행비서였다. 안희정이 대선후보로 나섰을 때 기간제 공무원으로 일하다 선배의 추천으로 캠프에 들어가게 되었고, 당시 문재인 후보에게 경선에서 패한 이후로는 문재인 캠프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그 후로 다시 안희정의 지시로 충남도지사 수행비서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업무를 수행하는 도중에 안희정에게 성폭행을 당하여 이를 TV뉴스 방송에서 폭로하기에 이른다. 책에 따르면 2017년 6월 27일에 수행비서 업무를 인계 받았는데, 뉴스룸에서 안희정의 성폭력 사실을 폭로한 것은 2018년 3월 5일이다. 그러니까 김지은씨가 폭로한 성폭력 사건은 입사 후 8개월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대법원 판결은 2019년 9월에 확정되었다.
이중적 리더의 최후
1장에서는 미투를 하게 된 전후 사정을 기술한다. 그리고 폭로 이후 일어난 2차 가해와 괴로움들을 기술한다. 그것은 너무 경악스러운 범죄였다. 그러나 2장 ‘노동자 김지은’에서 노동권을 하나도 존중받지 못했던 수행비서 업무의 이야기를 읽었을 때는 아직도 이런 위계에 의한 강압적 노동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동시에 안희정과 비슷하게 표리부동으로 따지자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여러 사람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사건 이전에 안희정은 진보적인 정치인으로 인기를 얻고 있었다. 노동시간 단축을 이야기하고 미투를 지지하며 페미니스트 정치인을 자처하던 그였다.
p.99 퇴근 후에도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가야 했다. 공적 업무 외에 사적으로 지시 받는 업무도많다 보니 어느 순간 공과 사가 구분이 안되는 상황이 되었다.”
p.100 “안희정 부인이 빵이 먹고 싶다고 하면 나는 다른 사람들이 식사하는 시간에 그걸 사러 다녀왔다. 유명 빵집이 멀든 그래서 내 밥을 못 먹든 상관없이 말이다. 이런 구매에 들어가는 돈은 누구에게도 받을 수 없었다.”
p.101 “정치인 안희정의 대외적 이미지와 내가 업무를 통해 겪는 실상은 낱낱이 상반되었다. 그는 신분과 계급이 존재하는 세계에 살았다. 나의 자리에서는 그에게 아주 기본적인 인권이나 노동권도 존중 받기를 기대할 수 없었다.”
안희정은 ‘기분을 나쁘게 했다’는 이유로 갑자기 직원을 해고시키는가 하면, ‘급’이 맞지 않는 자리에 연사로 초청되면 행사를 갑자기 취소시키고, 자신의 수행비서는 24시간 콜대기 상태였을 뿐 아니라, 조직 내 성폭력 사건은 무마시키는 사람이었다. ‘진보’ 나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많이 보던 리더의 모습이었다. 본인이 말하는 가치를 자기가 속한 조직에 실현시키지 못하는 그런 리더 말이다. 이중적인 리더는 자신의 가치를 실현시킬 능력이 없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둘 중 하나에 속하기 때문에 그런 기준으로 리더를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처음에는 좋아 보이던 사람들도 다시 보게 된 경험이 점차 쌓였다. 안희정은 그런 최악의 리더였고 결국 징역형을 살게 됐다.
권력의 눈치를 보는 재판? 과 ‘넹’의 의미
3장에서는 재판의 과정이 소개된다. 그 중 무죄를 선고한 1심에 대해 김지은씨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검찰의 집요한 수사와 재판부의 이상한 질문에도 성실히 대답했다. 일관되게 답했고, 말뿐이 아니라 많은 증거를 함께 제출했다. 정말 성실히, 악착같이 마음을 다잡고 수사와 재판에 임했다. 세 명의 판사는 피고인 안희정에게는 묻지 않았다.
‘왜 김지은에게 미안하다 말하며 여러 차례 농락했는가?’
‘왜 직접 페이스북에 합의에 의한 관계가 아니었다고 썼는가?’
‘왜 세 번이나 입장을 번복하였는가. 일관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왜 검찰 출두 직후 휴대폰을 파기했는가?’
왜 법원은 가해자 안희정에게는 묻지 않았을까?
‘위력은 존재하나 위력이 아니다. 거절을 했지만 유죄는 아니다.’
‘합의하지 않은 관계이나 강간은 아니다.’
‘원치 않은 성관계는 있었으나 성폭력은 아니다.’
도대체 뭐가 아니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재판부가 내게 했던 것처럼 안희정에게도 16시간을 질문했다면 1심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었다. 가해자가 의심스러운 행동을 보이고 말바꾸기를 했음에도 그에 대한 심문을 하지 않았다니?! 재판이 이렇게 불공정하게 이뤄졌을리가 있겠어? 라는 설마 하는 마음에 의심의 불을 붙이는 부분이었다. 법원은 왜 가해자의 마음을 그렇게나 먼저 헤아려주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가해자가 차기 대선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인물이어서 그런 것이었을까? 다행히 2심, 3심에서 안희정은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안희정 측에서 김지은씨와 연인관계였다는 증빙으로 문자에 ‘넹’ 이라고 대답한 기록을 제출했다는 것을 보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넹’이라고 대답해주면 이제부터 1일 되는거였나..? 내가 생각하는 재판은 객관적 근거를 바탕으로 합리적 판단이 이루어지는 일련의 과정이었으나 그것은 경우에따라 내 상상 속에만 있는 풍경일지도 모르겠다.
호떡 그리고 업무상 정신질병
4장 ‘세상과 단절’은 김지은씨의 일기다. 거기에는 병상일기도 포함되어 있다. 정확한 병명은 나와있지 않지만 김지은씨는 정신과 폐쇄병동에 자주 입원을 한 것 같다. 일기에 심적인 괴로움과 투병생활에서 있었던 에피소드가 나와있다. 김지은씨가 오랜만에 길거리 호떡을 사먹은 날의 이야기다.
p.241 “잠깐 서 있는 동안에 내내 누가 쳐다볼까 봐 두리번 거렸다. 내가 이런 걸 사 먹어도 되는 건지 스스로에게 계속 물었다. 한가로워 보일 것만 같았다. 그 생각 때문인지 속이 꽉 막혀 체하고 말았다. 호떡 하나 때문에 결국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그리고 4장을 읽는 도중 너무 힘들어서 중간에 며칠 쉬는 시간을 가졌다. 읽는 내내 김지은씨의 고통이 머리를 계속 파고 들었고 눈물이 나서 주체가 안되는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읽기 시작했을 때는 김지은씨가 앓는 정신질환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이것은 업무상 정신질환에 해당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업무상 발생한 사건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그로 인해 생계가 곤란해졌을 때를 대비해서 산재보험 보상 범위가 정신질환까지 확대되었다. 그 역사가 길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아직은 생소하겠지만 김지은씨라면 산재로 승인받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대형 혹은 유명사건들이 산재로 승인된다면, 피해자 보호 뿐만 아니라 직장 내 폭력을 예방하는 효과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가해자의 서사에 사로잡힌 당신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직장동료에게 이러한 책이 있으며 피해자의 육성을 듣는 것 처럼 읽어내려 갈 수 있다고 소개한 적이 있다. 그런데, 돌아온 반응은 ‘안희정이 평소에 어땠고~’ ‘둘이 연인관계였을 수는 있는데~’ 하는 전형적인 가해자 측 논리의 복사본이었다. 성폭력 사건은 유난히 가해자의 논리와 서사가 보도되는 경우도 많고 사람들의 관심도 거기에 쏠려있는 듯 하다. 그러는 사이 피해자가 이야기할 기회는 빼앗기고 그들을 위해 필요한 조치가 무엇인지 논의할 장이 마련되지 못한다. 김지은씨는 다행이 여성단체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나마도 매우 힘겹게 재판을 진행했다. 난 더 이상 가해자의 서사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 사회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말할 기회를 주고, 그들이 아픔을 어떻게 딛고 일상으로 회복할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한다. 끝으로 (이 서평을 읽으실 지 모르겠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이 책을 탄생시킨 김지은씨와 그녀와 연대한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34361769
안희정 미투 고발, 김지은씨의 고통스러운 기억
평소 들락날락 거리는 알라딘 도서 앱에 어느 날 자몽빛 배경의 신간 소개가 눈에 들어왔다. ‘김지은입니다. (부제: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 이었다. 평소 책을 고를 때 처럼 목차를 대충 훑어본 뒤 바로 구매했다. ‘대법원 판결이 났었구나..’ 빠르게 기사를 검색해보고 안희정이 유죄로 형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한 나의 지식은 그리 깊지 않았다.
서지현 검사를 필두로 미투가 봇물처럼 터져나올 때도 판에 박힌 주변인들의 2차 가해의 말들로 기사 제목들이 수 놓아졌고 나는 그것들을 온전한 정신으로 쳐다볼 수 있을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김지은씨의 방송과 그 이후의 안희정 기습검찰 출두 소동 등은 알고 있었지만 그 이후 오래 지속된 재판 소식을 계속 주시하고 있자니 정신적 소모가 컸다. 그래서 이후에 파생되는 뜬소문들-2차 가해에 해당하는-에 의도적으로 귀를 닫고 관련 기사를 읽지 않았다. 사실은 김지은씨가 방송에 나와 안희정의 성폭력 사실을 폭로했을 때 내가 다니던 회사에서도 성추행 문제가 발생했고 그를 둘러싼 처분을 진행하는 중에 있었다. 나의 몸과 마음 역시 상당히 닳고 있었다. 가해자 안희정이 하는 이야기나, 내 직장에서 가해자가 하는 이야기가 내용만 달랐지 형식적인 면에서는 똑같은 항변이었기에 더욱 괴로웠다.
아직도 회사에서의 기억은 너무나 괴롭다. 자세한 사정은 여기에 설명할 수 없지만 여전히 그 앙금이 많이 남아있다. 피해자가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되는 ‘피해의식’을 비정상적인 반응으로 여기고 지지는커녕 피해자를 고립시키려 했던 다른 동료들을 생각하면 아직까지도 너무 밉고 화가난다. 그렇기에 더욱 김지은씨가 지금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피해자 입장에서 기술한 사건의 경과는 어떠했는지 알고 싶었다.
세간에 많이 알려져있다시피 김지은씨는 안희정의 수행비서였다. 안희정이 대선후보로 나섰을 때 기간제 공무원으로 일하다 선배의 추천으로 캠프에 들어가게 되었고, 당시 문재인 후보에게 경선에서 패한 이후로는 문재인 캠프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그 후로 다시 안희정의 지시로 충남도지사 수행비서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업무를 수행하는 도중에 안희정에게 성폭행을 당하여 이를 TV뉴스 방송에서 폭로하기에 이른다. 책에 따르면 2017년 6월 27일에 수행비서 업무를 인계 받았는데, 뉴스룸에서 안희정의 성폭력 사실을 폭로한 것은 2018년 3월 5일이다. 그러니까 김지은씨가 폭로한 성폭력 사건은 입사 후 8개월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대법원 판결은 2019년 9월에 확정되었다.
이중적 리더의 최후
1장에서는 미투를 하게 된 전후 사정을 기술한다. 그리고 폭로 이후 일어난 2차 가해와 괴로움들을 기술한다. 그것은 너무 경악스러운 범죄였다. 그러나 2장 ‘노동자 김지은’에서 노동권을 하나도 존중받지 못했던 수행비서 업무의 이야기를 읽었을 때는 아직도 이런 위계에 의한 강압적 노동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동시에 안희정과 비슷하게 표리부동으로 따지자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여러 사람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사건 이전에 안희정은 진보적인 정치인으로 인기를 얻고 있었다. 노동시간 단축을 이야기하고 미투를 지지하며 페미니스트 정치인을 자처하던 그였다.
p.99 퇴근 후에도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가야 했다. 공적 업무 외에 사적으로 지시 받는 업무도많다 보니 어느 순간 공과 사가 구분이 안되는 상황이 되었다.”
p.100 “안희정 부인이 빵이 먹고 싶다고 하면 나는 다른 사람들이 식사하는 시간에 그걸 사러 다녀왔다. 유명 빵집이 멀든 그래서 내 밥을 못 먹든 상관없이 말이다. 이런 구매에 들어가는 돈은 누구에게도 받을 수 없었다.”
p.101 “정치인 안희정의 대외적 이미지와 내가 업무를 통해 겪는 실상은 낱낱이 상반되었다. 그는 신분과 계급이 존재하는 세계에 살았다. 나의 자리에서는 그에게 아주 기본적인 인권이나 노동권도 존중 받기를 기대할 수 없었다.”
안희정은 ‘기분을 나쁘게 했다’는 이유로 갑자기 직원을 해고시키는가 하면, ‘급’이 맞지 않는 자리에 연사로 초청되면 행사를 갑자기 취소시키고, 자신의 수행비서는 24시간 콜대기 상태였을 뿐 아니라, 조직 내 성폭력 사건은 무마시키는 사람이었다. ‘진보’ 나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많이 보던 리더의 모습이었다. 본인이 말하는 가치를 자기가 속한 조직에 실현시키지 못하는 그런 리더 말이다. 이중적인 리더는 자신의 가치를 실현시킬 능력이 없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둘 중 하나에 속하기 때문에 그런 기준으로 리더를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처음에는 좋아 보이던 사람들도 다시 보게 된 경험이 점차 쌓였다. 안희정은 그런 최악의 리더였고 결국 징역형을 살게 됐다.
권력의 눈치를 보는 재판? 과 ‘넹’의 의미
3장에서는 재판의 과정이 소개된다. 그 중 무죄를 선고한 1심에 대해 김지은씨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검찰의 집요한 수사와 재판부의 이상한 질문에도 성실히 대답했다. 일관되게 답했고, 말뿐이 아니라 많은 증거를 함께 제출했다. 정말 성실히, 악착같이 마음을 다잡고 수사와 재판에 임했다. 세 명의 판사는 피고인 안희정에게는 묻지 않았다.
‘왜 김지은에게 미안하다 말하며 여러 차례 농락했는가?’
‘왜 직접 페이스북에 합의에 의한 관계가 아니었다고 썼는가?’
‘왜 세 번이나 입장을 번복하였는가. 일관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왜 검찰 출두 직후 휴대폰을 파기했는가?’
왜 법원은 가해자 안희정에게는 묻지 않았을까?
‘위력은 존재하나 위력이 아니다. 거절을 했지만 유죄는 아니다.’
‘합의하지 않은 관계이나 강간은 아니다.’
‘원치 않은 성관계는 있었으나 성폭력은 아니다.’
도대체 뭐가 아니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재판부가 내게 했던 것처럼 안희정에게도 16시간을 질문했다면 1심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었다. 가해자가 의심스러운 행동을 보이고 말바꾸기를 했음에도 그에 대한 심문을 하지 않았다니?! 재판이 이렇게 불공정하게 이뤄졌을리가 있겠어? 라는 설마 하는 마음에 의심의 불을 붙이는 부분이었다. 법원은 왜 가해자의 마음을 그렇게나 먼저 헤아려주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가해자가 차기 대선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인물이어서 그런 것이었을까? 다행히 2심, 3심에서 안희정은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안희정 측에서 김지은씨와 연인관계였다는 증빙으로 문자에 ‘넹’ 이라고 대답한 기록을 제출했다는 것을 보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넹’이라고 대답해주면 이제부터 1일 되는거였나..? 내가 생각하는 재판은 객관적 근거를 바탕으로 합리적 판단이 이루어지는 일련의 과정이었으나 그것은 경우에따라 내 상상 속에만 있는 풍경일지도 모르겠다.
호떡 그리고 업무상 정신질병
4장 ‘세상과 단절’은 김지은씨의 일기다. 거기에는 병상일기도 포함되어 있다. 정확한 병명은 나와있지 않지만 김지은씨는 정신과 폐쇄병동에 자주 입원을 한 것 같다. 일기에 심적인 괴로움과 투병생활에서 있었던 에피소드가 나와있다. 김지은씨가 오랜만에 길거리 호떡을 사먹은 날의 이야기다.
p.241 “잠깐 서 있는 동안에 내내 누가 쳐다볼까 봐 두리번 거렸다. 내가 이런 걸 사 먹어도 되는 건지 스스로에게 계속 물었다. 한가로워 보일 것만 같았다. 그 생각 때문인지 속이 꽉 막혀 체하고 말았다. 호떡 하나 때문에 결국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그리고 4장을 읽는 도중 너무 힘들어서 중간에 며칠 쉬는 시간을 가졌다. 읽는 내내 김지은씨의 고통이 머리를 계속 파고 들었고 눈물이 나서 주체가 안되는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읽기 시작했을 때는 김지은씨가 앓는 정신질환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이것은 업무상 정신질환에 해당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업무상 발생한 사건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그로 인해 생계가 곤란해졌을 때를 대비해서 산재보험 보상 범위가 정신질환까지 확대되었다. 그 역사가 길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아직은 생소하겠지만 김지은씨라면 산재로 승인받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대형 혹은 유명사건들이 산재로 승인된다면, 피해자 보호 뿐만 아니라 직장 내 폭력을 예방하는 효과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가해자의 서사에 사로잡힌 당신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직장동료에게 이러한 책이 있으며 피해자의 육성을 듣는 것 처럼 읽어내려 갈 수 있다고 소개한 적이 있다. 그런데, 돌아온 반응은 ‘안희정이 평소에 어땠고~’ ‘둘이 연인관계였을 수는 있는데~’ 하는 전형적인 가해자 측 논리의 복사본이었다. 성폭력 사건은 유난히 가해자의 논리와 서사가 보도되는 경우도 많고 사람들의 관심도 거기에 쏠려있는 듯 하다. 그러는 사이 피해자가 이야기할 기회는 빼앗기고 그들을 위해 필요한 조치가 무엇인지 논의할 장이 마련되지 못한다. 김지은씨는 다행이 여성단체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나마도 매우 힘겹게 재판을 진행했다. 난 더 이상 가해자의 서사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 사회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말할 기회를 주고, 그들이 아픔을 어떻게 딛고 일상으로 회복할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한다. 끝으로 (이 서평을 읽으실 지 모르겠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이 책을 탄생시킨 김지은씨와 그녀와 연대한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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