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2(습관방) - 자유서평 기록들
<1차> 버스와 우울증의 정면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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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란2020-05-17 21:58
서평을 길게 써야만 좋다는 게 아님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저는 현직 의사이고 정신질환 진단받은 분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래서인지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특히 우울증이 심할 때)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저자의 증언에 어떤 의학적(혹은 생리학적) 관련이 있는지 몹시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구요. 학교에서 우울증이나 조현병(과거에 정신분열증이라 부르던..)이 왜 생기는가에 대해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이라고 배웠는데, 혹시 통증을 느끼는 중추와의 관련성을 이야기하는 가설은 없는지를 찾아봐야겠습니다. 저런 대형 교통 사고를 당한 사람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혹은 만성 통증을 겪다보니 우울증이 발병하기도 하는데, 이 작가는 정확히 반대의 순서(우울증->사고로 인한 통증)로 경험을 했는데도 관련지어 말씀해주셨으니 우울감과 통증 간에 긴밀한 관계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편, 실제 실연의 아픔을 겪는 사람에게 타이레놀같은 진통제가 감정을 완화시키는데 효과가 있다는 심리학 연구 결과도 있는데, 저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다른 분들도 혹시 스트레로 인해 몸이 아픈 것 처럼 느껴진 경험을 하신 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제목부터 상투적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힐링 느낌 문장형 제목. 주제도 뻔했다. 우울증 극복기라... 죽고 싶지만 떡볶이에 순대가 먹고 싶은 사람이 상담 받고 약을 먹었다 끊었다 반복하며 순례를 떠나는 수많은 우울증 책들이 서점에 쌓여있지만, 한번도 들춰보지 않았다. 우울증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런 책을 핑크색도 살구색도 아닌 어정쩡한 표지 색에 홀려 읽게 되었다.
뉴스에 나온 굵직굵직한 사건과 뭔지 모르지만 어마어마하게 느껴지는 고통, 찔끔찔끔 눈을 자극하는 감동. 저자의 삶에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다. 역시 필력이 깡패구나... 감탄하며, 맞아서 얼얼한 부위를 쓰다듬었다. 전혀 모르는 분야인데도 정신없이 빠져들게 만드는 글이었다.
저자는 20년간 우울증과 함께 해왔다. 이를 인정하고 싸우고 회복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더 다치고 다시 극복하는 이야기다. 버스 사고는 우울증과 정반대 방향에서 나타나 정면충돌 한다. 저자는 사고에서, 그리고 우울증에서 천천히 일어나고 있다.
우울증을 다룬 영화 「멜랑콜리아」가 생각난다. 우울증으로 괴로워하는 주인공 저스틴은 항상 죽음을 생각한다. 심지어 본인의 결혼식에서도. 어느 날 소행성이 지구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영화는 클라이맥스로 향한다. 이상한 건 여기부터다. 저스틴은 닥쳐올 죽음 앞에서 우울증에서 벗어난다. 반대로 현실을 성공적으로 잘 살아가던 인물은 소행성의 궤도를 확인하고 확신한 순간, 삶에서 도망쳐 버린다. 철학자 한병철이 말하듯, 부정성은 치유와 각성을 낳는다.
우울증은, 내가 아픈 건지 아니면 약한 건지 헷갈리게 한다. 그래서 약을 먹지 않고 버텨야 하는지, 약을 꾸준히 먹어서 버텨야 하는지 혼란스럽다. 저자도 마찬가지의 고민을 해왔다. 하지만 버스에 깔리면서 분명히 느낀다. 나는 분명히 아팠던 거구나, 나약한 게 아니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는다.
저자는 이제 우울증과 잘 지내고 있다. 역시, 싸우면 다 친해진다.
나도 강아지처럼 작고 귀엽다
_고요 「나는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몰랐습니다」